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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뼈와 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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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백남준-

 

지적이다. 감각과 본능을 이겨내는 것

 

감각과 본능을 이겨내면서 더 인간적이게 된다.


감각과 본능을 이겨내는 것이 세상의 진실을 보게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그대로 유지만 하려고 하는 것은 지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우리는 생산자로 나서는 도전을 해야한다.

 

예는 도덕의 끝, 인간성이 제대로 반영된 것이다. 인간의 가장 높은 단계로 확대된것.

 

논어는 인 확대하고 인을 키우는 방법론이다.

유학의 전체 시스템은 저것을 꿈꾸는 것이다. 개인보다 우리를 더욱 강화 할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하는 것을 선한 것으로 알면 이는 선하지 않다.

-노자 도덕경 2장-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패션이 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합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가? 디젤매니아에서 합의한 아름다움이 나의 아름다움인가?

 

노자는 저기보다는 여기를 지킴으로써 각자의 아름다움을 숭고히 여기는 사회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 이외에 모든 것을 세계라 부른다.

 

뭐든지 얼렁뚱당한다. "얼렁얼렁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우리의 최선을 다 하더라도 최선이 되기 어렵거늘 하물며 얼렁뚱당으로 대업을 이룰 수 있는가?" -도산 안창호-

 

과학적인 사고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뭐든지 얼렁뚱땅한다.

 

철학 하는 것은 일상의 일을 철저하게 한다는 것. 자기의 생활이 바껴야한다. 자기 집안을 깨끗히 정리정돈을 해야한다. 철학은 삶을 바꾸는 것이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신비는 혼자가 전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만들고, 예수가 종교를 만들고, 모택동이 중국의 사상을 만들듯이


우리는 우리의 책임자다. 나를 돌아보는 것이 세상이 바뀌는 것을 경험 할 수 있다.


노자는 이 세계는 유와 무로 되어있다. 철저히 하는 습관을 익히자 할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 이런 결의 없이 살아가지 말자.

 

욕망은 개별적인것이다. 정신과 육체중에 개별 적인것은 육체이다.


개별적이고 자발적인 사람은 '섹시' '섹스' '씨발'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이다.

 

서양철학에서의 진실은 움직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보편적인 것, 추상적인 것, 지적인 것, 관념적인 것

 

동양철학에서의 진실은 경험적인 것, 현상적인 것, 실재인 것

 

화엄종, 천태종, 선종, 이 종파는 인도불교가 도교를 받아들여서 중국 불교가 된 것이다.  AD60 

 

참된사람이 되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질문에 의해서 문명은 건설된것이다. 대답으로 나온것이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질문하지 못하는 한국 기자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질문은 자기가 들어있다. 자기한테만, 자기만의 고유함이 묻어있다. 따라서 질문할 때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질문은 인격이다. 


권력은 정보의 질과 양에 비례한다.

 

바람직함, 해야함, 이런 것들은 국가가 관리다. 그러나 이것에는 내가 없다.

 

바라는 곳, 하고싶은 것에 내가 있다.

 

문명의 주도권, 위대함은 바라는 곳, 하고싶은 것에 있다.

 

소비와 가식적 명예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 자발적, 창조적 욕구에 충족하면서 살겠다.

 

나의 내적 자발성과 존엄이 지켜지는 곳은 청와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군대, 현대(Hyundai)가 아니다. 람보르기니타고 배기음을 뿜으며 달리는 사람보다, 마티즈에서 마이클잭슨 노래를 듣고 평화를 꿈꾸며 달리는 사람이 되겠다. 나의 존엄과 자발, 개별성을 유지한다.

 

자유, 독립, 자존이 없이 그 어떤 확장,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너(비단 옷을 입은 사람)는 무엇을 빨아서 그렇게 많은 수례를 가졌느냐?

-장자에게 정부 관료 스카웃 제의를 했을 때의 일화-

 

자세히 살피는 능력은 극소수에게만 있는 능력이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우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 인간의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과 판단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본다는 것은 보려고 하는 것에 최대한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판단은 그 중간에 가기도 전에 자기와 세상의 시선으로 결정 지어버리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라는 것은 쪼개서 자세히 보는 것이다.

국가적 단위에서 과학과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시도가 없다. 그래서 한국은 현시대에도 감성적이고 도덕적이다. 감성과 도덕을 자극하는 지금의 행위는 모든 것에 'K'를 붙이는 언어다.

 

근대적 문명이 주체적으로 일어나지 않아서 자세히 보는 능력이 결여 되어 있다. 정치에도 비판적 시선으로 자기의 철학을 가지기 보다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자세를 가지게 된다.

 

자기가 저지른 일들, 자기의 습관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는 것은 습관적으로 사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는 도덕과 정치를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각 진영은 종교가 되었고, 각 진영의 반하는 논리를 가진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세상 만물의 모든 공부를 하면서, 자세히 들여다 보는 훈련을 했던 사람이 '장자'

 

예술품의 첫번째 조건은 의외성을 이야기 하는 고유함이다.

 

더불어, 우리, 사람 이런 것은 예술적이지가 않으머 폐쇄적이다. 한국의 언어에는 우리, 사람, 더불어가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개인, 자유, 고유성은 예술적이면서 개방적이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다. 여기서 이탈해서 '본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능력: 찰기시 ' 할 수 있는 사람만 우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함께라는 이념에 갇힌 사람은 함께 갈 수가 없다.

 

인간은 항상 다음(Next)을 추구한다. 다음의 다음은 미래이다. 백남준은 미래를 사유했다. 백남준은 인간을 사유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 매디치 가문을 보았다. 그 다음은? -> 매디치 가문처럼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다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멈춰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아는 것으로 아는 것으로 멈춰있다면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자본주위, 사회주의, 민주주의, 그 갇힌 생각에 중요한 중립은 없다

 

지성의 탁월성은 정도를 살피는 능력이 있느냐이다. 맞냐 아니냐가 아니고, maximum ~ minimum

 

정해진 말에 갇히면 좁아지고 도덕적, 윤리적, 감각적으로 빠진다.

 

정해진 말, 정해진 용법으로만 하는 것은 세계의 진실과 접촉 할 수 없다.

 

정해진 말의 노예가 될 것이냐? 정해진 말을 밟고 서서 내 말을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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